연말의 인천공항은 샌드위치 연휴를 맞아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분주했다.
일에 치여 폐인같이 지내던 나날을 보내고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게 된 나도 그들 틈에 섞여 출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뻗어버린 덕분에 한밤중에 일어나 여행준비를 하느라 허둥지둥 대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빠뜨린 것 없이 시간에 맞춰 올 수 있었다.
승객 한명이 아직 못탔다고 했나 예정보다 약간 늦게 출발한 거라던가, 도착 직전 건너편 자리에서 왠 미친 사람이 싸이코드라마를 찍기 시작했다던가 하는 걸 제외하면 나리타로 가는 두시간은 무척 순조로웠다.
탑승을 기다리며
이코노미석이긴 한데 일반적인 자리하고는 조금 달랐다.
출발을 앞두고
창가가 좋아
나리타 도착. 한국과는 달리 날씨가 별로 안좋았다.
모노레일
나리타에 도착한 뒤 비행기에서 내려 모노레일을 타고 입국심사대가 있는 2터미널로 향했다.
심사대 앞에는 11월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얼굴사진과 지문채취를 위한 인식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뭐 국내에선 이거 때문에 말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별 반감은 없었고 그저 심사 시간이 오래걸리는 게 신경쓰였는데, 의외로 신속하게 진행되어서 금방 내 차례가 돌아왔다.
지문을 찍고 카메라를 향해 씨익 웃어준 뒤 심사대를 빠져나와 전철을 타러 갔다.
수고들 하슈
오늘은 이곳저곳 돌아다니게 될 것 같아서 야마노테선 1일 패스인 토쿠나이 후리킷푸를 사려고 JR의 열차표 판매기 앞에서 얼쩡대고 있는데, 마침 직원이 지나가길래 물어봤더니 매표소로 가라고 한다.
그냥 귀찮아서 케이세이선 매표소로 가서 닛포리로 가는 표를 구입했다.
예전에는 일본에 왔다는 것 자체가 마냥 낯설고 신기했기 때문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이젠 한두번 오는 것도 아니고 닛포리까지 가는 한시간은 너무나 지루했다.
결국 나는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짐가방을 뒤져 통화도 안되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테트리스를 하며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닛포리에서 정산을 하면서 토쿠나이 후리킷푸를 살 수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또 다른데로 가라는 말을 해주길래 그냥 신오쿠보 가는 걸 달라고 했다.
신오쿠보 역 앞에서 김군에게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역 앞의 전화기 두대 중 한대는 고장나 있었고, 나머지 한대는 누군가가 쓰고 있어서 또다시 귀찮이즘이 발동한 나는 대충 기억을 더듬어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김군의 기숙사 앞까지 찾아와버렸다.
김군을 만나 짐을 풀어두고 밥을 먹으러 나왔다.
뭘 먹을지 고민하다 어느새 신주쿠까지 걸어 온 우리는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밥, 뒷면이 나오면 면을 먹기로 하고 결국 뒷면이 나와 오던 길에 봤던 라멘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두번다시 라멘가게에서 오오모리는 먹지말자고 다짐했다.
신주쿠로 향하던 길에
근성으로 라멘을 전부 뱃속으로 집어넣고 가게를 나오자 김군이 오늘의 일정을 물어보았다.
첫날 계획은 늘 밖에서만 보던 도쿄타워에 올라가 보는 것이었는데 뭐가 불만인지 도통 의욕이 나질 않는 것이다.
날씨도 안좋은데 아 그냥 가지말까.. 하고 있는데, 김군이 선뜻 도쿄타워에는 자기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면서 같이 가자고 한다.
하루종일 날 짓누르고 있던 귀찮음을 겨우 털어내버리고, 우리는 전철을 타러 신주쿠역으로 향했다.
하마마츠쵸 역에 내려 도쿄타워 방면 출구로 나오자 밖은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들고 걸어가자 도쿄타워 앞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맞다.. 며칠 있으면 크리스마스지...
도쿄타워를 후닥닥 보고 내려오려던 내 계획은 매표소 앞을 메우고 있던 커플들에 의해 깨져버렸다.
가엾게도.
신주쿠 역 앞에서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도쿄타워
비가 내리는게 오히려 분위기 있어 좋았다.
2년전에는 여기까지만 보고 돌아갔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아 장식중
표를 구입해 엘레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를 향해 올라갔다.
날씨가 안 좋긴 했는데 마침 딱 어두워진 참이라 야경을 볼 수 있게 되어 오히려 더 좋았다.
예전에 가봤던 후쿠오카 타워나 코베 포트타워 같은 곳도 좋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도심의 모습은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이런 곳에 비추를 날려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쿄타워는 여기가 꼭대기는 아니고 제 2전망대라는 곳이 따로 있었는데, 그곳은 또 600엔을 내고 전용 엘레베이터를 타야 올라갈 수 있었다.
7시까지 알바를 나가야하는 김군이 신경쓰였으나 일단 왔으니 끝까지 가보자는 김군의 말에 2전망대로 가는 줄을 섰는데 쭉쭉 빠져나가던 1층 엘레베이터와는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줄이 줄어들 생각을 안하는 것이다.
달팽이보다 느린 속도로 천천히 앞으로 향하던 우리는 잠시 후 나타난 표지판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여기부터 약 30분 예정'
이 탈력적인 선언에 줄에서 이탈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우리는 그동안 기다린게 아까워서 그냥 버티고 서서 결국 표를 구입해 엘레베이터를 타러 갔다.
이곳과 2전망대 사이에는 단 한대의 엘레베이터가 그 많은 사람들의 승/하강을 모두 떠맏고 있었고, 우린 비좁은 복도에서 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이때만 해도 별거 아닌 줄 알았다.
오노..
엘레베이터는 한대 뿐.
진땀을 빼며 2전망대에 도착한 순간 나는 비로소 왜 사람들이 이곳을 비추하는지 알 수 있었다.
먼저 올라와 있던 사람들 중 3분의2가 내려가는 엘레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600엔의 추가요금을 내고 30분 이상을 기다려 이곳까지 올라온 댓가는, 엘레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내려가는 줄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려와서는 당연히 또 1층으로 향하는 줄을 서야 했다^^
평소에 질서를 안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교정 프로그램의 장으로서 이곳 도쿄타워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그 고생을 하고 사진은 이거 한장 찍었다.
떠나는 우리를 향해 하트를 날려주던 도쿄타워
하마마츠쵸 돌아오면서
도쿄타워를 뒤로 하고
하마마츠쵸역으로 돌아와 전철을 타고 신오쿠보로 향하던 도중, 북오프에나 들렀다 올 생각에 김군을 보내고 먼저 하라주쿠에서 내렸다.
아까 그치는 듯 했던 비는 하라주쿠에서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은 김군이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비를 다 맞으면서 북오프로 향했는데 어이없게도 그곳은 이미 폐점되고 없었다.
내가 가본 북오프 중에서 가장 많은 중고 CD와 서적을 보유하고 있던 하라주쿠점이었지만 그 자리에는 이제 떨어져 나간 간판자국과 근처 지점들의 약도만 남아있었다.
황당한 마음을 뒤로 하고 일단 가장 가까워 보이는 요요기점에라도 가보기로 한 뒤 하라주쿠를 떠났다.
난 북오프 요요기점은 커녕 JR 요요기역이 어딨는지도 몰랐지만, 그냥 열차가 가는 쪽으로 가다보면(하라주쿠에서 한 정거장) 나오겠지 하는 생각에 철길 옆에 딱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길이 꺾이고 더 이상 철길을 따라 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별 수 없이 옆의 골목길로 들어갔는데 이건 무슨 미로도 아니고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7시밖에 안됐는데 인적이라곤 찾아 볼 수 없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 골목길에서 덜덜 떨면서 헤메다가 일단 큰길로 빠져나와서 다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얼마 안가서 큰길로 나올 수 있었고 아주 잘 못 온 건 아니었는지 금방 요요기역이 나타났다. 마침 북오프도 역 근처에 있었다.
힘들게 찾아온 북오프였지만 역시나 예전의 하라주쿠점과 비교하면 내가 찾는 것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책과 CD를 몇개 집어들고 서점을 나온 나는 여기까지 걸어온거 내친 김에 신오쿠보까지도 걸어가 볼까 하다가 괜히 객기부리지 말기로 하고 요요기역으로 돌아와 전철표를 끊었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골목길~
요요기 도착
북오프
신오쿠보로 돌아오니 이대로 들어가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하라주쿠에서는 허탕을 쳤고, 요요기에서도 그다지 건진 게 없었기 때문에 신오쿠보 근처의 북오프들도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길을 잃었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비만 잔뜩 맞고 김군의 기숙사 앞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김군을 찾아가 키를 건네받고 기숙사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뭔가 하루를 찝찝하게 끝낸 듯한 기분에 잠이 좀처럼 오질 않았다.
눈을 감고 뒤척이는 동안 창밖에서는 어딘가 불이라도 났는지 사이렌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쉬움은 맥주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