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를 보며 슬슬 퇴근한 뒤 대충 준비를 마치고 10시 쯤 집을 나섰다.
작년에 워낙 허둥댔던 기억이 있는지라 이번엔 미리 준비를 해둔다고 해뒀는데, 그때문에 오히려 방심을 했는지 빼놓고 온 것들이 몇개 있긴 했다.
공항에 도착해 여행사 직원을 찾아가자, 항공권과 여러 잡다한 여행정보들이 들어있는 묵직한 봉투를 하나 건네준다.
아니 뭐 놀러가는 것도 아닌데.. 내게는 전혀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 봉투를 다시 직원에게 돌려준 뒤 항공권만을 가방에 챙겨넣고 수속을 기다렸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2시 15분 인천을 떠난 비행기는 4시 즈음에 하네다에 도착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매우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다름아닌 내가 비행기 안에서 바로 잠들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휴가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체력 안배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조금이나마 자둔게 도움이 되려나..
공항을 빠져나가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얼마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신종 인플루엔자의 영향으로 이전까지 형식적으로 이뤄지던 검역 절차가 조금 까다로워 진 것이다.
한사람 씩 일일히 검역관련 서류를 작성하여 직원에게 건네주고 나서야 입국심사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공항을 나와 전철역으로 향하자 마침 시나가와로 가는 첫차가 도착해 있었다.
시나가와에서 JR 야마노테선으로 갈아탄 나는 신오쿠보로 향했다.
작년 여름부터 호텔을 이용하며 김군과 작별하는 듯 했던 나였지만, 룸메이트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무섭게 나는 다시 신오쿠보의 중력에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재수없는 동네라고 욕해도 내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시나가와 행 첫차를 타고 6시 20분 좀 넘어서 열차는 신오쿠보에 도착했고, 나는 김군의 집을 찾아갔다.
집 앞에 다다른 나는 김군이 알려준 장소에서 열쇠를 꺼내든 뒤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
'형..'
'왔다'
'어..'
10개월만에 만난 김군과 나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김군은 다시 잠을 청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다시 눈을 뜬 건 11시가 넘어서였는데, 어차피 공연은 2시부터니 좀 더 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도로 눈을 감아버렸다.
12시가 되어서야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하고 김군과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미소카츠 정식인가 하는 걸 먹었는데, 밥 무한 리필 된다고 해서 괜히 한공기 더먹었다가 배 터지는줄-_- 점심을 해결하고 백엔샾에 들러 몇가지 생필품을 구입한 뒤 1시쯤 김군과 헤어져 신주쿠로 향했다.
사실 이번에도 김군이 극장 앞까지 같이 가줄 줄 알았는데 그냥 가버려서 살짝 당황했지만-_- 그래도 이제 3년째나 됐으니 대충 찾아가면 나오지 않을까 싶긴 했다.
뭐 그걸 대비해서 약도도 다 뽑아왔으니까..
아, 안가져왔지.

새됐어
아까 몇가지 빼놓고 온게 있다고 했는데 하필 그게 약도를 그려둔 수첩이었다.
아무리 지정석이라 줄 설 필요는 없다고 해도, 적어도 10분 전까지는 가야 할텐데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기억을 더듬어 SPACE107을 찾아가기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서 나는 길을 잃었다.
여긴 아닌것 같고, 저쪽으로 가보면 아무것도 없고, 반대편으로 가보면 아까 왔던 길이고.. 개연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나는 신주쿠 한복판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채 허둥대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앞이 보이지 않아ㅜㅜ '이러다 정말 공연 못보는 거 아냐???' 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는 가운데 문득 눈 앞에 신주쿠 역이 보였다.
순간 나의 머리속에 기적같은 영감이 떠올랐고, 전철역 안으로 들어가 역사를 가로지르자 눈 앞에는 낮익은 거리가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을 몇개 지나자 내 앞에 보이는 것은 SPACE107.
시간은 정확히 1시 55분이었다.
올해도 시작은 이곳에서. 극장 앞에는 아직 입장을 하지 않은 사람이 몇명 있었는데 그들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자 접수처에는 블랑샤의 배우 중 한분이신 '마츠모토 타카코' 씨가 앉아있었다.
가방에서 예약내역을 프린트 해온 것을 꺼내고 있는데 마츠모토 씨가 내 얼굴을 보더니 '宋さん?' 하고 묻는 것이다.
헉, 어떻게 아셨어요??? 순간 멍해진 내 앞에서 마츠모토 씨는 티켓을 꺼내어 건네주면서 공연 날짜와 입장 시간등을 설명해 주는데, 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도통 모르겠고 그냥 하이하이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미 공연 시작 시간은 지났기 때문에 티켓을 받아들자마자 딴 생각 할 겨를 없이 바로 입장해야 했다.
극장 안은 관객들로 가득했지만, 다행히 내 자리는 복도 쪽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눈치보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다.
아직 공연은 시작되지 않은 상태였고, 크게 한숨을 쉬고는 나도 무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블랑샤 멤버인 아카히라 텟페이 씨가 각본을 쓴 이번 공연은 니시하라 씨가 새로운 연기 도전을 선언하면서 공연 전부터 많은 이들의 궁금즘을 유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목과 포스터 외에는 간략한 줄거리라던가 하는 공연 내용에 관한 정보가 전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무대가 될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포스터만 보고 야구에 관련된 얘기겠거니 라고 추측하고 있었지만 직접 무대를 지켜본 결과, 나는 완벽하게 낚인 거였다.
야구라던가, 콘프레이크라던가 하는 소재들은 공연 도중 짤막하게 활용되긴 하지만 직접적인 주제에는 사실상 관계가 없었고, 정답은 바로 [Family Trap] 이라는 제목에 있었다.
평범한 가정 카타야마家 에서 일어나는 이틀간의 해프닝을 다룬 코믹 터치의 가족 드라마였는데, 아카히라 씨의 첫 작품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짜임새 있게 두시간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특별히 장면전환 같은 것이 없이 오로지 카타야마家 의 거실에서만 모든 사건이 진행되는데, 스무드한 템포로 이야기에 지루함이 없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어느 한 인물 묻히는 일이 없이 개성을 살려주고 있었다.
정말 이번 한 작품으로 끝나는게 아쉬울 정도로 훗날 기획이 있다면 속편을 보고 싶은 완성도였다.
'평범한 가정' 이라는 부분에서 어느정도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지만 니시하라 씨는 '카타야마 마키' 라는 이름의 세 자녀를 둔 가정주부 역으로 출연하셨다.
그동안 연기했던 앨리스나 아이리스.. 작년 공연의 모모코 등과는 전혀 다른, 어떻게 보면 정극 연기에 도전한 셈인데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다.
10대 때부터 연기자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어느정도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셨다고도 할 수 있는 니시하라 씨였는데 이번 공연에서 정말 본인이 해보고 싶으셨던 것들을 마음껏 풀어나가시는 듯한 모습..
헐렁헐렁한 옷차림에 화려하지 않은 꾸밈새로 등장한 모습마저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정말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을 또 한번 느끼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잠깐 극장 안에 머물렀는데, 어차피 아직 공연은 두번이나 남았고 지금부터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SPACE107을 나와 신주쿠를 잠깐 돌아다녔다.
생각해보니 급하게 오느라 화장실도 못갔네..
지인에게 부탁받은 물건들이 있어 신주쿠의 소프맙이나 트레이더 등지를 뒤져봤는데 별건 없었고, 나도 딱히 더 갈데가 없어서 다시 극장 앞으로 돌아왔다.
오후 공연부터는 자유석이라 일찍 줄을 서야 하긴 했다.
자유석은 극장 앞에 선착순으로 줄을 서서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데, 내가 5시 쯤 도착했는데도(7시 공연) 앞에는 사람이 꽤 있었다.
6시에 번호표 배포가 시작되었고, 나는 13번을 받아들었다.

2시
공연 끝나고 잠시 극장 안에서.. 무슨 학원에서 화환을 보내왔다.

공연 티켓..

꽤 일찍 왔음에도 13번을 받았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20분 뒤, 입장이 시작되었고 다시 극장 안으로 들어오자 첫번째 줄은 이미 전멸이었다.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이제는 어딘가 친숙한 그런 얼굴들..-_-
첫번째 줄은 놓친 마당에 그냥 여유있게 3열에 앉았는데, 하필 내 앞에 앉은 사람 둘이 상당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어서 공연 관람에 큰 지장이 있었다ojL
-낮 공연과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기도 하고, 공연 감상에 대해서는 생략-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로비에서는 츠쿠이 쿄세이 씨가 티셔츠를 판매중이었다.
이번 공연은 딱히 상품이라 할 만한 것이 이 티셔츠 밖에 없었는데, 사이즈가 M과 S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구입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냥 기념으로 작은 사이즈라도 사갈까.. 하는데 한 남자가 츠쿠이 씨에게 L 사이즈는 없냐고 물어보자 샘플로 벽에 붙어있던 것을 떼서 보여준다;
남자는 옷을 이리 저리 살펴보다가 그다지 끌리지는 않는지 도로 스탶에게 돌려주었고 나는 이때다 싶어서 잽싸게 티셔츠를 스틸해갔다.-_-V
티셔츠를 구입하고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각오를 새로이 하고 출연진들이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작년과 같은 실패는 한번이면 족하다. 게다가 올해는 비록 웹 공간이긴 하지만 니시하라 씨에게 나의 존재도 각인시켜 드린 터.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고, 출연진들도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니시하라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림.. 아직 별 기색은 보이지 않고, 가만히 문 앞에 서있는게 무료했던 나는 반대편 거리로 왔다갔다 하며 수시로 SPACE107 쪽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 뒤로 한 20여분 그러고 있었나..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살짝 다른데를 보고 있는 사이 극장에서 두 사람이 현관을 통해 나서는 모습이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
그 두사람은 출연진 중 한 분인 쿠보타 히로나리 씨, 그리고 또 한명은 다름아닌 니시하라 씨였다.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안돼 안돼.. 하며 황급히 길을 건너왔지만 이미 두 사람은 슝하고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작년의 아픈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뒤쫓아 가서라도 말을 건넬 작정으로 같은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거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해지는 것이다.
한밤중에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서 '팬입니다 싸인해주세요' 라니-_-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냥 걸음을 멈춰버렸고, 니시하라 씨는 길가에 이미 대기중이던 차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

아니야!!!!!!!!!!!!!! ..이제는 화 낼 기운도 없었다.
아직 한번의 공연이 남아있다고 해도, 천추락이라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오늘 저녁이 마지막 기회였다.(공연 뒷마무리를 해야 하므로)
뭘 믿고 낮 공연때부터 그렇게 여유를 부린건지.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SPACE107 주위를 어슬렁거렸지만, 그런다고 시간이 거꾸로 흐를 리는 없었다.
1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다시 찾아온 기회는, 나의 찌질함 만을 재확인 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밤거리를 헤메며 간신히 신오쿠보로 돌아온 나는 김군을 불러내 술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던 도중에만 해도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던 나였는데, 안그래도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상태에서 술까지 들어가자 묘한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작년에도 오늘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뭐고도 없이 그냥 공항으로 향해야 했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내일은 어떻게든 결판을 내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술기운에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맘에도 없는 것들을 잔뜩 구입하며 과소비를 했다.(???)
영화도 드라마도 막판에 반전이 있어야 재밌는 법이라지만.
나는 과연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아직 끝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