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 and Learn2005/10/23 07:29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MBC의 '대단한 도전'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다지 관심있게 본 적은 없어서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코미디언 이경규씨를 비롯한 연예인들이 출연해 각종 스포츠-를 빙자한 게임-으로 승부를 겨루는 내용으로 기억합니다.(사실 이 프로그램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도 MBC-ESPN에서 스포츠 중계는 안하고 허구한 날 이 '대단한 도전' 만 재방송 해대던게 짜증이 나서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저는 '한심한 도전' 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여러 종목의 선수들을 초청해 놓고 별 희한한 게임을 하다가 이겼다고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이 스포츠를 우습게 보는 행위같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 게임 자체가 전혀 재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도 다른 의미에서의 한심한 도전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Holymogiri의 한심한 도전


 작년 여름과 가을, 저는 드림캐스트에 두 스포츠 스타의 싸인을 받았습니다. 바로 NBA스타 게리 페이튼과 테니스 요정 마리아 샤라포바에게서 받은 싸인입니다. -관련 포스팅 보기- 싸인회장에서 불쑥 들이민 이 정체불명의 물건에 당사자는 물론 주변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물론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요. (페이튼에게 드캐를 건네줬을 때 주위에서 들려왔던 '미치겠다..' 라는 말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문제의 드림캐스트


 이 싸인이 어떤 싸인입니까. 학교숙제를 마치고 선생님에게 받는 싸인도 아니고, 택배를 수령해가면서 경비실에다 하는 싸인도 아닌 당대 최고 스타들의 싸인입니다. 당연히 봉인-보존의 수순에 들어가야 하겠으나 저에겐 드캐가 이것 한대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싸인이 소중하다 해도 게임은 해야하겠기에 저는 그냥 먼지나 쌓이지 말라고 수건 한장 올려놓은채 드캐를 방치해두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싸인은 변색되기 시작했습니다. 페이튼의 싸인은 그나마 오래 버텨주고 있었지만, 샤라포바의 것은 매직펜이 안좋은 것이었는지 날이 갈수록 색이 옅어지고 있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올해 4월과 10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눈에 띄게 색이 옅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대로 놓아 두어선 안된다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싸인이 다 지워져 없어진 뒤에 '샤라포바 싸인받은 드캐야' 라고 남들에게 말해봤자 '미친놈' 내지는 '그럼 내 플스는 베이브 루스 싸인 받은 거다' 라는 말이나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방 안을 둘러보니 5년전에 코스프레 재료를 만든답시고 사놓고 한번도 쓰지 않은 철물점 투명락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걸로 어떻게 안될까..' 싸인이 되어있는 뚜껑 부분에만 잘 뿌리면 싸인도 보호하고 반짝거려서 예쁠 것 같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는 락카를 뿌려보기로 결정하고 인터넷을 통해 조언을 구했습니다.

 '뚜껑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후면의 볼트 4개를 빼서 전면부를 들어내면 된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저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드디어 저의 한심한 도전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도전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조언에 따르면 볼트 4개를 빼야 하는데 제가 보기에 드캐 후면부에는 볼트구멍이 3개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낑낑대던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뎀을 빼 보았고 비로소 숨어있던 볼트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흑 이런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역시 난 바보야ㅜㅜ)



어? 4개랬는데?(정신없는 와중에 찍은 탓에 사진상태가 들쭉날쭉합니다. 양해해 주세요)



여기 있었구나!



처음으로 분해해 본 드캐. 이때까지만 해도 뿌듯했습니다.



뚜껑을 떼어내고..


 이제 락카를 뿌릴 차례입니다. 작업장.. 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곳은 제 베란다인데, 별로 넓지도 않은 공간에 얼마전부터 옷걸이를 들여놓아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작업을 망치는 것은 물론, 집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시작해 버린 것을.



작업장-_-의 모습. 그 흔한 신문 한장 없어서 대학 다닐때 쓰던 스케치북을 뜯어서 바닥에 깔았습니다. 거지가 따로 없습니다.


 10월도 끝자락에 접어들어서 한밤중은 겨울 못지 않게 춥습니다. 그리고 저는 앉을 공간도 없는 비좁은 베란다에 웅크린 채 창문을 열어놓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5년이나 된 거라 분사구가 막히진 않았을까 걱정하면서도 열심히 락카를 흔들었습니다. 시험 삼아 조금 뿌려보니 다행히 잘 나오는 듯 합니다. 다음은 조심스럽게 드캐 뚜껑에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Oh My God!!!!! 끔찍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싸인이 락카에 녹아 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색재료에 관한 지식은 전무한 탓에 잘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락카에 유성매직을 녹이는 성분이 있는 듯 했습니다.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었지만 지금 손을 댔다간 더더욱 악화될 뿐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저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전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베란다를 나왔습니다. 담배를 피지는 않았지만 흡연자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저 더 이상 락카가 흘러내리지 않기를 바라며 몇시간 뒤 다시 베란다로 가보니 불행중 다행으로 싸인은 일부만이 녹아있었습니다. 하지만 락카를 고루 뿌려주지 못해서 뚜껑 전면이 누렇게 얼룩져있었습니다.







참사의 현장


 피해가 최소화되었다고 해도 결국은 혹 떼려다 혹 붙인 셈입니다. 뭐 보여줄 일은 없겠지만 훼손되어 버린 싸인들을 GP와 샤라포바가 보면 뭐라고 할 지 궁금했습니다. 사실 이 싸인들은 몇년전 코리아텐더 푸르미에서 평균 9득점 4리바운드를 기록하다 시즌 초반 퇴출되었고, 엠씨 매지크의 이복형제인 동명의 게리 페이튼과 역시 세계랭킹 445위이자 얼마전 한솔오픈에서 1회전 탈락한 동명의 하위랭커 마리아 샤라포바한테 받은 것이라고 자기암시를 걸며 충격에서 벗어나보려 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안정을 찾은 저는 곧 드캐를 조립하려 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한심했던 도전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준비성 없는 자에게의 벌이었을까요. 저는 마지막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뚜껑을 떼어낼 때 걸리적거려서 같이 분해해 버렸던 트레이 부분을 어떻게 다시 결합할지 막막한 것이었습니다. 분해할 때도 '어 여긴 조금 복잡한데?' 싶었지만 뭐 별 일 있겠나 싶어서 그대로 뜯어낸게 화근이었습니다.



Help~~-_-


 이 부분을 제대로 결합하지 않으면 뚜껑은 열리지 않습니다. 저는 수십번 부품들을 고쳐 끼워보았지만 여전히 뚜껑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짜증은 분노로 변했고 몇번이나 드캐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재결합에 몰두했습니다. 사실 이 게임기가 드캐만 아니었으면 벌써 두조각이 나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낑낑;;


 그 뒤로 세시간을 트레이 결합에 쏟아부었지만 도저히 길을 찾지 못한 저는 결국 두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캐 분해에 대해 조언해 주셨고 세가가가넷의 운영자이신 THE ROCK님께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분해 조립의 문제였기 때문에 쉽게 해결 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THE ROCK님께서 도리캬스 닷넷의 운영자이신 강방호님께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해 주셨고, 곧 답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방호님께서 자신의 드림캐스트를 직접 분해하셔서 사진과 함께 상세한 설명을 해주신 것입니다. THE ROCK님과 강방호님께 감사드립니다. 몇번이고 반복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의 아낌없는 도움으로 다시 드캐를 조립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뚜껑이 여닫히는 드캐가 마냥 신기하게 보입니다. 조바심과 준비없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 게임기 가지고 장난치지 않을 것임을, 아니 장난을 치더라도 충분한 사전지식을 갖춘 뒤 칠 것을 다짐해 보면서 저의 한심한 도전을 마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THE ROCK님과 강방호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쁜 드캐^^
Posted by GONZAL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