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온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어제 못 가본 시부야와 하라주쿠를 돌아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토도로키(等々力) 계곡에 가보기로 했다.
(東急大井町)선으로 갈아타 토도로키 역에 도착했다. 토도로키는 도쿄 외곽에 위치한 조그마한 동네였다.
토도로키 계곡은 어렸을 때 읽었던 <창가의 토토쨩> 이라는 책에서 주인공 토토네 학교가 소풍을
왔던 곳이다.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기에 일본에 가면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역을 나서자 출구에서부터 계곡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드문드문 보여서 어제처럼 헤메는 일은 없었다.
토도로키 역의 모습. 아담한 역이다.
계곡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안내도.
계곡으로 가는 길에 있던 골프 다리. 어째서는 골프인지는?
토도로키 계곡 입구에 들어서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는
평범한 마을이었던 곳이 수풀이 우거지고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세상 모든 고뇌에서 해방된 기분-_-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계곡 안에서. 산에나 가야 있을 법한 곳이 동네 한복판에 있다.
산책로는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산책로가 끝난 곳에서도 물이 계속 흐르고 있어서 죽 따라가
보았다. 주택가를 지나서 물이 막히는 곳까지 걸어 갔다가 다시 왔던 길을 돌아나왔다. 어제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곳에 있다보니 그런건 말끔히 없어져 버리고,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었다.
토도로키 계곡에서 '초자력 충전' 을 한 내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시부야였다. 시부야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왜 드래곤 애쉬의 노래에도 있지 않은가. '시부야 롯폰기 소 시슌키모~'
더욱이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거리에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발 가는대로
쏘다니기 시작했다. 어차피 각종 가이드북이나 여행 사이트에 소개된 곳들은 단지 예일 뿐이고,
재밌는 건 스스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사실 귀찮아서 안 찾아봤다-_-
시부야 역에 있던 루팡 3세 스탬프. 누구야 루팡 얼굴에 도장 찍은 게.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세가 STUDIO라는 곳이 있길래 들어가 보았다. 기대와는 달리 UFO
캐처와 건슈팅 게임들만 가득 있었다.
안을 둘러보다 소닉 UFO 캐처가 있길래 소닉을 노리고 도전해 보았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
쉽사리 1000엔을 날리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이번엔 테일즈를 목표로 마지막 도전을 했다.
집게가 테일즈를 사뿐히 들어올려 떨어뜨리는 듯... 했으나 테일즈가 배출구 바로 앞에 거꾸로
매달려 나의 선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난 눈치를 보면서 기계를 툭툭 쳐봤지만 어림 없었고,
결국 눈물을 머금으며 100엔을 투입해 드디어 테일즈를 끄집어 냈다.
세가 STUDIO 앞에서. 시부야에 도착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돈을 갈취해간 소닉 UFO 캐처.
저, 저자식이...
잡았다 요놈!!
테일즈를 잡고 세가 STUDIO를 나와보니 옆에 극장이 있었다. 마침 대히트 중이던 춤추는
대수사선 2를 볼까 하고 시간을 확인해 봤더니 30분 쯤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시간에 더 돌아다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그냥 나와 시부야 역 앞으로 가니 한
아마추어 밴드가 공연을 시작하고 있었다. 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진 않았지만 열정적인
무대였다.
20분 정도의 짧은 공연이 끝나고 그들은 밴드의 공연 일정이 실린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전단지를 받고 발길을 돌리던 중 일본에 왔으니 일본인과 사진 한장 찍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에 다시 돌아가 밴드의 여성 보컬에게 말을 걸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공연을 보러 와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진을 부탁했고
아야코라는 이름의 그녀가 흔쾌히 승낙해서 같이 한장 찍게 되었다.
시부야 역 근처에 있는 하치코 동상. 약속장소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건물 전체에서 영상이 흘러나와 오.. 하고 바라보았다.
전위적으로 생긴 석상.
일본의 여학생들. 이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시부야 역 앞에서. 광고판에 데이빗 베컴이 보인다.
게릴라 콘서트? 역 앞에서 깜짝 공연을 펼치는 아마추어 밴드 La Milktea.
작지만 열정적인 무대.
제일 열심히 박수 치시던 할아버지. 즐기는데 노소가 따로 있겠는가.
비 같은 건 이들에게 아무 상관이 없었다.
탤런트 최상학과 닮았던 보컬/기타 요시미츠.
폭발적 가창력의 보컬 아야코.
Fever~ Fever~
아야코와 함께! 일본 여행 중 유일하게 내 얼굴이 나오는 사진이다.
그들과 작별한 뒤 다시 떠돌기 시작한 나는 전력관이란 건물을 발견해 그곳으로 들어갔다.
한층씩 올라가보니 전기절약의 필요성, 전기가 만들어지는 원리 등을 소개하는 체험관 같은
곳이 있었다. 시설로 보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보나, 어린이 취향이었지만, 나름대로 볼거리가
있었기 때문에-나의 정신 수준이 낮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휴식도 취할 겸 해서 전력관에서
잠시 머물렀다.
잠깐 들여다 본 디즈니 캐릭터 샾. 사람이 무지 많았던 관계로 사진만 찍고 바로 나왔다.
전력관의 모습.
앗, 도레미다.
아이코도 있고.
하즈키도 있었다.
조금 이상하게 생긴 마징가 군단. 앞에는 엣쨩과 타루루토군도 보인다.
전기를 소중하게! 전력관 마스코트 덴코쨩.
이윽고 전력관을 나온 나는 HMV, 타워레코드 등을 둘러보았지만 그다지 흥미를 끄는 것들이
없어 시부야를 떠나 하라주쿠로 향했다.
그런데 시부야에 조금 오래 있어서였는지, 하라주쿠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지친 나머지 근처의 롯데리아에 들어가서 허기를 때웠다. 기운이 없으니 정신까지 오락가락
하는지 주문할때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알아듣지 못한 점원이 영어로 되묻는 등 트러블이 있었다.
아무튼 햄버거를 대충 먹고 일어나 북오프를 찾아갔다. 한국에서는 침만 흘리던 물건들이 이
곳에는 가득 있었다. 사쿠라대전 음반을 가득 들고 카운터로 향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게임 소
프트 코너로 가봤다.
......잠시 후 나는 CD를 조용히 제자리에 갔다놓은 뒤 드림캐스트 게임들을 한 아름(과장임)
안고 북오프를 나왔다.
하라주쿠 역.
새턴이다... 북오프 안에서는 여러가지 의미로 갈등했다.
북오프를 나오고 나니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시부야에서처럼 아무곳이나 가보기에는 날이
너무 어두웠다. 그래도 돌아다녀보자라고 생각하고 다시 목적도 없이 걸어가보았지만 곧 길을
잃고 헤멜 뿐이었다.
한참을 헤메다 간신히 길을 찾아 하라주쿠 역으로 돌아온 나는 이제 더 돌아다니기는 글렀다
싶어서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마침 신주쿠에 들러야 할 일이 있기도 했다.
하라주쿠를 대표하는 거리 타케시타 토리(竹下通リ). 안은 별별 희한한 가게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길을 잃어도 이제 별 감흥이 없다.
신주쿠에 도착해 빅카메라를 찾아갔다. 디지털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때문이었다. 원래 민박집에
메모리 카드 리더기가 있다는 말에 USB도 그냥 두고 온 것이었는데 하필 내 메모리 카드만 맞지
않는 것이었다.
리더기의 가격은 5000엔! 엄청나게 비쌌다. 거기다 생각해보니 충전 어댑터도 안가지고 온
기억이 났다. 어댑터 가격을 물어보니 역시 5000엔! 생각지 못한 지출에 맥이 빠졌지만,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메모리 카드 리더기만 구입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나는 춤추는 대수사선 2를 봐야겠다며 다시 극장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늦어서 전부 마지막 상영이 끝난 뒤였다.
춤추는 대수사선 2. 오다 유지의 미소는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일본의 자판기 콜라. 한번에 마시기에는 조금 많다.
엄청난 규모의 신주쿠 역. 7개 노선이 통과한다.
힘없이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돈은 엉뚱한 곳에 날리고, 엉망진창인
기분이었다.
"Ende gut alles gut" 라고 했던가.
옛말 틀린게 하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