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좀 넘어서 선내의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지금 아카시(明石) 대교 밑을 지나가고 있으며 오사카에는 언제쯤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어제 일찍부터 뻗어버린 탓에 피로는 거진 풀린 듯 했다.
세면을 마치고 창 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페리는 어느덧 오사카 이즈미오츠(泉大津) 항에 도착해, 승객들이 하나 둘 짐을 챙겨 출구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터미널을 나서니 셔틀버스가 대기중이었고, '어제도 이걸 탔으면..'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셔틀버스는 JR 이즈미오츠역에서 멈췄고, 나는 전철을 타고 민박이 위치하고 있는 난바(難波)로 향했다.
체크인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일단 이 거추장스러운 여행가방부터 떼어놔야 조금이라도 자유로워 질 것 같아서 짐만 먼저 맡겨 둘 생각이었다.
난바역에서 15분 거리라는 민박을 나는 또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다가 한시간 뒤에야 찾아갔다.
짐을 맡겨두고 다시 난바로 돌아왔다. 오늘의 계획은 히메지(姬路)성과 코베(神戶).
두군데 다 꽤나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시간 분배를 잘해야 하는데, 민박 찾느라 이리저리 헤메는 바람에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 했다.
'또 수박 겉핥기가 되겠군' 하면서도 히메지행 열차표를 구입했다.
한큐우메다(阪急梅田)선을 타고 종점인 신카이치(新開地)까지 가서 다시 열차를 기다리는데, 나는 또 어제와 같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히메지행' 이라는 글만 보고 아무 생각없이 올라탔는데, 이놈의 열차가 세월아네월아 히메지까지 갈 생각을 안하는 것이다. 한정거장씩 모두 정차하는 보통열차를 탔으니 그럴 수 밖에.. (신카이치에서 히메지까지는 대략 45정거장..)
뒤늦게 내려서 특급으로 갈아탔지만, 일본의 복잡한 열차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실수는 계속 반복될 것만 같았다.
결국 히메지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훨씬 늦어버린 2시.
히메지성으로 향하는 도중, 일본에 온 뒤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제부터 계속 시간에 쫓기다 보니 끼니를 챙길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코베 가기전까지는 식사를 하기로 했다.
역에서 15분 정도 걸으니 히메지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같이 하얗고 멋진 성의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날씨만 좋았어도 금상첨화였을텐데 라는 약간 아쉬운 마음과 함께 천수각(天守閣)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보이는 히메지성. 역에서 한참 걸어가야 된다.
입구에 들어서서.
왜 내가 가면 날씨가 이런거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천수각 들어가기 전에.
천수각 내부를 관람할때는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게 되는데, 이게 또 고역이었다.
슬리퍼는 맞지도 않는데다 미끄러워서 걷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무척 가파라서 무슨 등산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허기에 지쳐있는 나인만큼, 언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거의 기다시피해서 6층까지 올라가니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기에 잠시 천수각 아래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다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가는 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천수각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3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못가본 곳들이 있었지만, 코베에서의 일정도 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히메지역으로 향하..
..려다 방향을 바꿔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이 이상 뭔가 먹지 않았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근데 왜 하필 편의점이냐구요? 이쪽이 훨씬 싸니까...-_-
도시락을 집어들고 나온 나는 마치 이틀은 굶은 사람처럼-아니 이틀 굶은 것 맞군-처절하게 먹어치우고는 다시 히메지역으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는 코베. 왔던 길을 쭉 되돌아가 산노미야(三官)에서 내렸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해보려고 애쓴 노력도 부질없이, 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있었다.
내가 여행을 다닐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오다이바, 요코하마 등 야경이 아름다운 곳에 가면 꼭 야경 '만' 보고 돌아오곤 했다는 것이다.
애당초 관광지로 조성된 곳인만큼 그 외에도 즐길거리는 많을 것이고, 야경이야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즐기면 될 일인데 난 그 반대이니.. 코베를 여행계획에 넣으면서 '이번에야말로!' 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보시는대로.
어찌됐든 코베에 왔으니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하기로 했다. 저 유명한 이진칸가이(異人館街)고 뭐고 다 패스하고 바로 메리켄 파크로 향했다. 도중에 난킨마치(南京町)라는 차이나타운을 지나쳤는데, 곳곳에 노점상이 널려있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들 뭔가 먹을 것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나도 하나 사먹을까.. 하다가 일단은 메리켄 파크와 하버랜드를 보고 난 뒤로 미루기로 했다.
난킨마치에서. 이 근처에 노점상이 밀집되어 있다.
장안문. 이곳을 나가 메리켄 파크로 갔다.
북적이던 난킨마치와는 달리 메리켄 파크 쪽은 썰렁했다.
코베 포트타워나 해양박물관 등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고, 바다낚시를 하거나 보드를 타는 사람만이 몇명 보일 뿐이었다. 날이 저문건 사실이지만, 사실 그렇게 늦은 시간만은 아니었는데 이렇게나 사람이 없다니 계절을 잘못 맞춰왔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른 시간부터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건 좋았지만..
그렇게 코베의 야경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하던 나였지만 곧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어제부터 메모리 생각안하고 사진을 찍어대더니 내 128M 메모리의 용량이 거의 바닥이 난 것이다.
이제 겨우 여행 이틀째일 뿐인데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니!
남은 기간동안 일회용 카메라를 사들고 다니는 것은 미친짓일 뿐이었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괜히 카메라를 들고 설정을 만지작거리다 사진 사이즈 조절 항목을 발견한 나는(그 전까지는 이런게 있다는 걸 몰랐다는 소리다-_-) 최소 해상도인 640 X 480 으로 사이즈를 변경했고 메모리는 약간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메리켄 파크에서 찍었던 야경사진을 몽땅 지워서 수백여장의 공간을 확보한 뒤 나는 아까 찍었던 사진들을 처음부터 다시 찍기 시작했다..
구경만 한 코베 포트타워.
코베 해양박물관.
오리엔탈 호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갈 때 탔던 산타마리아 호를 복원한 모형.
메리켄 파크에서 바라본 하버랜드.
이번엔 그 반대.
메리켄 파크가 워낙에 조용해서 하버랜드라고 별거 있겠나 싶었지만, 이 쪽은 또 나름대로 떠들썩했다. 복합 쇼핑몰 모자이크와 옆에 있는 유원지 모자이크 가든은 가족(or 커플..) 단위의 남녀로 붐비고 있었다. 일본에 와서까지 염장어택을 받아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했지만, 다 내가 초래한 결과기 때문에 할말은 없었다.
모자이크 내의 게임센터에서. 마리오 카트가 설치되어 있다.

사이좋게 하우스 오브 더 데드 4를 하며 좀비들에게 사랑의 총알을 날려대던 커플. 뒤에서 보고 있던 내 표정은 저 좀비의 표정과 같았다.
모자이크 가든 입구.
대관람차 '원더 홀'
흔히 볼수 있는 놀이시설들이지만
바이오 해저드 4D-EXECUTER가 있었다.
모자이크 일대를 잠시 돌아다니던 나는 하버랜드의 메인 스트리트인 커넬 가든으로 향했다. 이곳을 지나 하버 워크를 거쳐 메리켄 파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커넬 가든을 지나 밖으로 나가니 하버 워크의 도개교가 나타났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의외로 분위기는 괜찮아서 그 주위를 돌아보다 다시 메리켄 파크로 돌아왔다. 밤이 깊어지면서 드문드문 보이던 사람들도 거의 돌아간 뒤였고 날씨도 꽤나 싸늘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커넬 가든에서
커넬 가든의 상징 딩동. 재밌는 원리로 작동하는 시계이다.
커넬 가든을 빠져나오자 커다란 기린상이 있다.
하버워크에 놓여져 있는 도개교
선상에서 디너를 즐길 수 있는 콘체르토 크루징. 승선료 1800엔. 식사 5200엔(부터)
다시 한번 메리켄 파크를 돌아본 뒤 코베 항 진재(震災) 메모리얼 파크에 들렀다.
2차대전 이후 최대의 재해라는 1995년 한신대지진 때 메리켄 파크의 40% 정도가 가라앉았는데, 당시의 잔재를
그대로 보존해 둔 곳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였나, 전체 조회를 앞두고 강당에서 TV를 켜놓고 뉴스를 보고 있는데 대만에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속보가 나오자 갑자기 전교생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던 모습에 오싹했던 기억이 났다.
증기로 작동하는 시계. 한시간에 한번씩 연기를 내뿜었다. 이거 설마 코란이..?
진재 메모리얼 파크에서. 고인들에게 명복을..
메리켄 파크를 나와 난킨마치로 들어서니 북적대던 사람들은 거짓말같이 사라져 있고 대부분의 노점들도 철수한 뒤였다. 하지만 아직 영업을 하는 곳이 몇군데 있었기 때문에 나도 새우 경단을 사들고 오사카로 돌아가기 위해 모토마치(元町)역으로 갔다.
한산한 분위기의 난킨마치
내가 먹은 새우경단
모토마치에서 전철을 타고 난바로 돌아왔다. 아직 체크인을 안한 상태라서 민박 주인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니, 원래는 다인실로 예약이 되어 있지만 오늘 묵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혼자서 방을 쓰게 됐다고 한다. '아, 그래요?' 겉으로는 덤덤한 척 했지만 내심 쾌재를 부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이켜보니 아침에 민박에 찾아가는 것부터 히메지, 코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계획과 빗나가버렸다. 결국 건진 것이라고는 코베의 야경 뿐이었으니.
하지만 '내일은 또 다를것이다' 라며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