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꼬박 샜다. 아니 몇번인가는 잠든것도 같은데 바로 깨어났다. 난 성격이 예민한-이라기보다는 쓸데없는데 집착이 많은-편이라서 조용하지 않은 곳에서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데, 버스 안에서는 오죽할까.(휴게실에 들를때마다 왔다갔다 하던 옆좌석의 '마츠이' 씨도 한몫 거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잠들어보려고 눈이라도 감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켜지더니 벌써 신주쿠에 도착했다는 것이다.-_-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30분.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한채 버스에서 떨궈진 나는 무거운 몸을 끌며 신주쿠 역으로 들어갔다.
짐부터 맡겨둬야겠다는 생각에 민박이 있는 신오쿠보로 향했다. 체크인이 2시 반 부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단 말이나 해보기로 하고 6시 쯤 민박으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음이 울리더니 한 남자가 짜증 가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지금은 안되고 8시쯤에나 오라고 한다. 어디서 시간이나 때우고 올까 하다가 만사가 귀찮아져서 신오쿠보 역 앞에서 그냥 두시간을 서 있었다.
8시가 되어 민박으로 향했다. 초인종을 눌렀더니 아무 반응도 없길래 공중전화로 돌아가 전화를 하니 받질 않는다. 미치겠군..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전화를 해보니 아까 그 남자가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전화를 받았다. 뭔가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지금 간다고만 하고 끊었다.
다시 민박으로 가서 초인종을 누르니 역시나 잠잠하다. 아니 이 인간들이 누굴 바보로 보나?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 나는 안되겠다 싶어서 민박 안으로 무단침입을 감행했다. 사무실(?) 같은 곳에 사람은 안보이고 어디서 칼질하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아줌마 한명이 야채를 썰고 있다. 아줌마는 잠시 나를 티꺼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하던 일을 멈추고 좀 전의 사무실(?) 같은 곳으로 들어가더니 담배를 꼬나물며 이름을 물었다. 난 더이상 참지 못하고..
특정인물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고는 싶으나 한겨울에 길거리에서 자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짐만 맡기고 민박을 나왔다.
아침부터 기분을 잡친 나는 곧바로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10시 남짓 도착했기 때문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문을 연 매장도 별로 없어서 역 앞의 게이머즈로 들어갔다. 이곳에 찾는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나 때우기로 했다.
게이머즈 본점.
요즘 만화는 거의 안봐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인기몰이하던 DOA4
게이머즈에서 대충 시간을 보내다가 나왔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매장들은 개점 준비중이었다. 더 이상 게이머즈에서는 볼게 없었기 때문에 오락실이나 갈까 해서 길을 건너 클럽 세가로 향했다. 내 실력에 게임 할 건 아니고 그냥 구경만 하러..
클럽 세가
오구라 유코 너무 이쁘다~^^
1층은 UFO 캐처
그 위에는 삼국지 대전 등의 카드게임과 이니셜 D 같은 게임기가.
소닉과 테일즈의 일러스트가 들어간 쓰레기통
철권 5 DARK RESURRECTION
클럽 세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나 흘러서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하루 종일 아키하바라에 짱박혀 있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도중에 한 매장에서 우연히 거울을 보게 되었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충혈되어 게슴츠레한 눈, 세수도 못한 얼굴. 한마디로 거지였다 거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여행 계획이 일본에서의 7박 8일인지 티벳에서의 7년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이곳 아키하바라에는 나같은 몰골의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신 게임엔 그닥 관심이 없어서 주로 새턴이나 메가드라이브 소프트들을 찾아다녔는데, 확실히 아키하바라에서도 드캐 이하 세가 게임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일본에만 가면 뭐든지 구할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곳이라고 보물창고는 아니었다.
7시 반 쯤 민박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원래는 바로 태정낭만당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런 흉측한 몰골로는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샤워 하고 옷 갈아입고 머리에 힘도 주고 이케부쿠로로 향했다.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가요쇼 기간이니 더 영업하지 않을까 싶었다.
태정낭만당에 들어서서 영업시간을 보니 태정낭만당 9시, 사쿠라카페는 10시까지였다. 이러면 평소하고 같은데.. 연장영업은 안하는 건가? 바글바글거릴거라고 생각했던 방문객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사실 도쿄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태정낭만당에서 쓸 돈 아껴서 게임이나 더 사가자.. 라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이곳에 오니 생각이 달라졌다. 또 이것저것 집어들고 만 나는 하루종일 아키하바라에서 쓴 돈보다 더 많은 지출을 태정낭만당에서 해버렸다.
태정낭만당도 그렇지만 사쿠라카페도 이상하게 사람이 없었다. 원래 이시간이면 가요쇼 끝나고 온 사람들로 가득해야 하는데.. 사쿠라카페로 들어가니 점원이 9시 이후에는 마실것 밖에 주문이 안되는데 괜찮겠냐고 묻는다. 사실은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별수 없이 알았다고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점원 얼굴이 낯이 익었다. 아!
작년 여름의..
난 무척 반가웠지만 당장 아는척을 하긴 좀 뭐하고 해서 일단 주문부터 하기로 했다. 내가 주문한 것은 요네다의 만작(米田の晩酌-저녁 이후에 마시는 술). 그런데 주문을 받은 점원이 갑자기 무어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츠칸(熱燗)과 레이슈(冷酒) 중에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어버버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츠칸은 뭐고.. 레이슈? @o@; 당황하는 내 표정을 이해한 듯 점원은 친절하게 둘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츠칸은 뜨거운 것, 레이슈는 차가운 것. 이렇게 간단할 수가!-_- 날도 추웠기 때문에 아츠칸을 주문했다.
이거 의외로 독하다. 로벨리아 칵테일처럼 만만하게 보고 한번에 들이켰다가 얼굴에 불이.. 띠용띠용;;
사람도 없는데 혼자 술마시고 있으려니 뻘쭘하긴 했지만(당시 카페 안에는 나를 포함해 단 두명이 있었다) 아무튼 다 마시고 나서 계산을 하러 가니 방금 전의 점원이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Holy: 그런데, 오늘 생각보다 사람이 없네요.
점원: 아! 오늘 가요쇼는 낮공연이라서요.
Holy: 아하..!
(이후 가요쇼에 대한 얘기를 함)
Holy: 저도 가요쇼 보러 왔는데.
점원: ?
역시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엔 갸우뚱했지만 작년 여름 가요쇼 얘기를 꺼내자 그제서야 알겠다는 눈치다. 작년에 다시 오겠다고 해놓고 못온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한참 반갑게 얘기를 나누다가 이번에는 반드시 내일이든, 모레든 다시 오겠다고 하자 기대하고 있겠다고 한다.
술기운이 약간 올랐는지 돌아오는 길은 내내 기분이 들떠있었다. 최악의 상황으로 시작한 하루였지만 이렇게 마무리 할 수 있게 된 건 행운일 것이다.
이곳만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지갑이 가벼워지는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