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땀 뻘뻘 흘려가며 최소화 시킨 짐들을 챙겨 민박을 나섰다. 처음 일정을 짤 때만 해도 도쿄에서 일주일 동안 뭘하나 했었는데 어느새 마지막 날이라니.
스가모에서 미타카(三鷹)로 가는 표를 구입해 전철을 탔다. 오늘 일정은 미타카에 있는 지브리 미술관에 들렀다 하네다(羽田)로 향해 귀국하는 것. 사실 귀축형이 사쿠라카페에 들렀다 가야겠다고 했을 때 적잖게 마음이 흔들렸었지만.. 미술관 티켓을 이미 사둔 것도 있고, 사쿠라카페엔 어제도 원래 계획을 깨가면서까지 다녀온 만큼, 오늘은 일정을 따르기로 했다.
짐들을 다 들고 미타카까지 가는 건 꽤나 번거로운 일이 될 것이기에 신주쿠의 코인락커에 넣어두고 올 생각이었는데, 지갑을 보니 2000엔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_- 아니 언제 다 쓴 거야.. 하네다까지의 교통비가 1060엔이었기 때문에 코인락커를 이용할 여유는 되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수가 없었기 때문에 섣불리 써버릴 수는 없었다.
신주쿠에서 츄오(中央)선으로 갈아타 미타카로 향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안좋았는데, 미타카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참 여행의 시작과 마지막을 비와 함께..;; 역 앞에서는 미술관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지만(200엔), 탈 사정이 못되는 나는 1Km가 넘는 거리를 캐리어를 끌고 비를 맞아가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간 걷다보니 지브리 미술관 표지판이 보였고, 나보다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근처 공원의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시간이 되어 미술관의 문이 열렸고, 입장이 시작되었다.
아직 700미터 더 가야 된다..
비를 피하던 중
이 매표소에서는 표를 팔지 않는다
입구 앞에서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데 티켓을 확인하던 미술관 직원이 무어라고 말을 건네왔다. 귀를 세우고 들어보려고 했지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잠시 후 그 직원이 내게 영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すみません, 日本語でお願いします^^;(미안합니다, 일본어로 부탁드려요)'
서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두사람은 그제서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들고 있는 캐리어는 지하 1층의 인포메이션에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미술관 안에서 이걸 계속 끌고 다녀야 하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게 되었다.
알려준대로 짐을 맡겨둔 뒤 미술관 관람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애니메이션 볼 일이 별로 없지만 한 때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에 환장했던 시절이 있던 나인지라, 환상까지는 갖지 않더라도 어느정도 기대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술관에 있던 시간 내내 '입장권값 1000엔을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귀축형이랑 태정낭만당에 가는게 나았을지도' 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이곳이 형편없었다던가 하는건 아니었지만.. 채 가시지 않은 가요쇼의 감흥이 이후의 모든 일정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다 좋았는데 시기가 나빴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왔던 로봇.
결국 나는 두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12시가 안되어 지브리 미술관에서 나오고 말았다.
맡겨둔 캐리어를 찾아 다시 미타카역까지 걸어가 하네다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시나가와(品川)에서 내려 케이큐(京急) 전철로 갈아타 하네다로 향했는데 확실히 나리타로 가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하네다 공항 역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국제선 터미널로 건너가니 1시 40분 정도였다. 귀축형과는 2시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짐을 내려두고 형을 기다렸다.
귀축형은 생각보다 늦은 2시 30분 쯤에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사쿠라카페에 사람이 하도 많아서 기다리다 늦었다고 한다.
형은 자기짐보다 한국에서 부탁받아서 들고 온게 몇배는 많다며 투덜거렸고, 실제로도 잡지같은게 잔뜩 들어있는 쇼핑백은 무거워 보였다. 캐리어를 따로 보내기 위해 무게를 달아보니 약 15kg 정도가 나왔는데, 공간이 조금 남아서 형의 잡지를 몇권 넣으니 무게는 18kg로 늘어났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에 잠깐 들렀는데, 비행기 탑승시간인 3시 35분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귀축형이 아직 시간이 있다며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딴청 피우고 있는 동안 어딘가에서는 계속 JAL8833기에 빨리 탑승하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결국 마지막 방송이 끝난 뒤에야 우리는 사태를 파악하고 비행기를 타러 뛰어갔고, 무사히(?) 탑승을 마치고 한숨 돌리자마자 비행기는 잽싸게 이륙을 시작했다.
맥주에 기내식에 영화 한편 보는 사이 김포에는 금방 도착했다.
아직 8월은 절반 밖에 지나가지 않았고, 서울의 무더위도 일주일 전과 똑같았지만─
나의 여름은 오늘로 끝이다.